배추 무 씨는 늦여름 꿈의 부피처럼 쬐그맣다 텃밭 풀 뽑고 괭이로 쪼슬러 두
둑 세워 심었다 나는 가으내 돈 벌러 떠돌고 아내 혼자 거름 주고 벌레 잡아 힘
껏 키워냈던가 김장독 삿갓 씌우고 움 파 무 거꾸로 세워 묻고 시래기 엮어 추녀
끝에 내걸으니 문득 앞산 희끗한 아침, 대접 속 무청이 새파랗다 배추김치 새빨
갛다 그 아리고 서늘함 무슨 천년 묵은 밀지이듯 곰곰 씹어보다 눈두덩이 공연히
따뜻해지다 햇살 동쪽 창호에 붉은 날
- 시집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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쬐그만 무 배추씨가 자라서 아름드리 포기가 버는 걸 보면 우주의 대폭발이 생각난다. 작은 생명이 피우고 밀어 올리는 그 힘이 우주를 닮아 있다. 농부의 아내가 키워 올린 '늦여름 꿈의 부피'의 크기가, 파란 무청과 김장의 붉은 빛으로 시인의 겨울을 따뜻하게 데운다. 사람살이의 기쁨이 특별한 곳에 있지 않음을, 시인과 그의 아내는 알고 있다. 김치는 아직도 우리에게 큰 기쁨이요 희망이다. (배창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