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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재 성 출향인·유튜버 |
ⓒ 성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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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가천면 마수리(법전리) 뒷산에서 200여년간을 만수동임을 모든 이에게 알려주었다가, 오래전 잊혀졌던 만수동 표지석을 확인하고 기고를 한 적이 있습니다. 세상의 온갖 통설과 의견이 분분하여 쉽게 진실에 접근하기가 용이하지 않은 것 또한 현실입니다.
가야산은 경북 성주군과 경남 합천군과 경계를 이루어 있는 사이에 수천 년 세월이 흐르고 많은 인걸들이 지나가며 가야산을 스스로의 취향대로 명산이라 칭송합니다.
고은 최치원의 제가야산독서당, 성주인 이숭인 성주목사 변계량도 가야산 시 한수 남깁니다. 그리고 이중환 선생입니다. 선생은 숙종39년 증광문과 병과에 급제했고, 성호 이익의 실사구시 학풍을 계승합니다. 그런 그에게 영조가 즉위하자 노론이 집권하여 남인인 선생은 목호룡의 당여로 지목되어 1725년(영조1) 2~4월에 4차례나 형을 받았고, 1726년 절도로 유배시켰다가, 다음해 10월에 석방되었으나 그해 12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다시 유배됩니다. 그 이후 행적은 알 수 없음을 미루어 짐작컨데 이중환에게 신임사화는 사대부로서의 포부를 펼칠 기회가 사라짐은 물론 한 집안의 몰락으로 힘겨운 생이 시작되게 합니다. 유배생활 종료와 함께 심화되는 조정의 당파색채가 이중환 선생을 전국 방랑생활로 내몰게 됩니다.
그러나 그마저도 세상은 쉽게 허락하지 않은 듯합니다. 조선 개국부터 대우를 받아왔던 사대부들은 점차 한정된 관직을 차지하기 위하여 나라의 형법을 이용하여 사사로운 원수를 갚기도 하고, 사대부의 기강이 쇠해지면서 옳다 그르다는 다툼이 심해지고, 다툼이 심해지면서 원수가 깊어지고, 원수가 깊어지니 서로 죽이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사약을 받은 송시열 김창집 윤휴 허적 김수항 이사명 김익훈 민암 이의징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김일경 박필몽 이사상 이진유 윤성시 서종하 이명의 등 쟁쟁한 인물이 수없이 많으며, 이외에도 수많은 사대부가 조선 후기에 사사되어 생을 마감합니다.
결국 사대부의 마지막 선택지는 초야에 묻혀 학문수양하는 것이겠지요. 이 또한 초야에 묻혀 있던 사대부들이 난을 일으키며 사회가 혼란스러워지자, 조정은 으슥한 초야를 의심의 눈초리로 경계를 강화합니다.
대표적인 의심이 왕조 교체의 예언이 들어있다는 '정감록'일 것 입니다. 정감록은 조선의 대표적 금서라 하겠습니다. 정감록은 성주 가야산 만수동을 전란을 피해 살 수 있는 곳으로 소개하고 있기도 합니다.
택리지는 성주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임진년 왜란 때 금강산 지리산 속리산 덕유산은 모두 외적의 전화를 면치 못하였으나, 오직 오대산 소백산 가야산에만 이르지 못했다. 삼재가 들지 않는 곳이라고 소개합니다.
복거총론 말미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慶尙大丘琴湖星州伽川金山鳳溪幷甫田 / 壤自新羅至今人烟不衰地理生利俱可作世居之地 / 但不可避兵惟伽川鳳谿近嶺治亂俱可居止
"경상도에는 대구의 금호와 성주의 가천과 김산(현 김천)의 봉계가 있다. 모두 들이 크고 땅이 기름져 신라때부터 지금까지 사람 사는 집이 줄지 않는다. 지리와 생리가 모두 여러 대를 이어 살만한 곳이다. 다만 난리를 피하기에는 적당하지 못하다. 오직 가천과 봉계가 고개와 가까워 평시나 난시에도 모두 살 만하다"
유배 후 이중환 선생은 전라도와 평안도는 가보지 못했지만, 함경도 강원도 황해도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는 많이 가보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夫全羅平安卽余所不見咸咸鏡江原黃海京畿忠淸慶尙余多見之矣)
많은 현지 답사를 통해 쓰여진 기록은 진실을 닮고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성주 가천은 지리와 생리가 오랫동안 살 수 있는 곳으로 난리를 피할 수 있는 곳이라고 기술되어진 것입니다. 사람들이 살기좋은 만수동이 성주군 가천면에 있음을 알려주는 또 하나의 증표라 여겨집니다. 십승지 가야산 만수동의 진실을 택리지가 말하는 것은 아닐런지요. 오늘도 마수리 뒷산에 묵묵히 비바람 맞으며 만수동을 지키고 있는 표지석도 택리지 사연을 듣고 기뻐하며 웃는 형상이 파노라마처럼 보여지는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