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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재 성 출향인·유튜버 |
ⓒ 성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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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문화유산과 업적을 정리 집대성 하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2021년 11월 9일 십승지지편 기존의 합천 가야산 만수동에서 성주 가야산 남쪽 만수동으로 내용이 변경 되어, 가칭 사단법인 성주 십승지 연구소에서 오랜 기간의 역사적 오류를 바로 잡아 성주가 십승지의 고장으로 확정 되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모든 백성들이 전쟁이 없는 곳을 찾아 피난길에 오릅니다. 임진왜란을 기록한 이순신 장군외에도 왜란의 참화를 반성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자는 취지로 ‘징비록’을 저술 합니다. 서애 선생께서 임진왜란(1592~1598년)의 내용을 전쟁 후 정리하셨지만, 징비록에 십승지 중의 하나로 ‘가야’라고 기술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그 동안 가야산 만수동을 어디인지 알 수는 없으나, 합천의 어디에 있어서 합천이 십승지지의 하나라고 주장을 하여 왔습니다. 그리고 친환경 농산물 등 많은 마케팅에도 활용을 해 왔습니다,
가칭 사단법인 성주 십승지 연구소는 가야산 만수동이 합천군 가야면이 아닌 성주군 가천면 마수리 부근이라는 것을 입증 했습니다. 첫 번째로 만수동임을 알리는 큼직한 표지석을 찾았습니다. 옛날부터 마수리 법전리에 사셨던 어르신들께서는 다 알고 있었지만, 조선십승지와 연관되는 증표라 연관짓지 않으시고 살기 좋아 오래 산다 하여 만수동이라 마을 이름이 지어졌다고 구전으로 전해졌던 것입니다. 위치는 경북 성주군 가천면 법전리 산 112-1 (마수리와 경계지점)에 있고, 크기는 표지석이 가로 320㎝ 높이 116㎝ 윗부분(앞뒤) 160㎝, 萬寿洞 글씨가 가로 72㎝ 세로 27㎝ 이다. 십승지 관련하여 만수동 표지석의 모습을 8월 22일 유투버 (korea road view)와 성주신문 9월 14일자에 처음 선보였습니다. 만수동이 아닌 곳에 만수동이란 표지석을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 일 것입니다.
둘째 정감록에서 星州 伽倻山南有寄洞 (一作 萬壽洞) 周回二百里 可以得保保身. ‘만수동 주위가 200리’라고 알려져 있는데, 성주 십승지 연구소가 실측을 해 보았습니다. 가야산 백운동 탐방소에서 들리미까지 9Km , 지금은 사라진 윗 사부랭이, 염주실, 옹기점 등은 포함시키지 않았는데도 가천의 마수리 곰시 봉양리 사가정 계곡과 수륜 백운동 가야산성의 거리 실제로 측정했습니다.
성주지역의 사라진 마을 윗사부랭이, 염주실, 서침실과 옹기점 등은 현장을 가보지는 않았지만, 200리가 측정됨을 확인했습니다. 남격암 십승지론에는 ‘300리’라고도 적혀 있는데, 이 마저도 가능 할 듯 합니다. 이는 성주가 가야산의 70%를 차지 하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입니다. 지금까지 가야산 남쪽하면 합천이라 잘못된 선입관 때문에 발생했다 하겠습니다. 실제로 가야산 남쪽은 성주가 더 큽니다. 옛날 군사들이 병영생활을 했을 가야산성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주군 가천면은 십승지의 형성 과정을 경주최씨, 김해김씨. 진주강씨 집성촌의 족보를 통하여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합천군 가야면은 유명한 사찰 해인사의 대로에 위치하고 있어 외적의 침입에 바로 노출 되어 있고, 만수동이라 언급하는 숭산마을과 가천리, 구미리 등 합천의 마을은 거창고개에서 내려오면 한 눈에 마을 전경이 다 들어 옵니다. 또 치인리가 만수동이라 할 경우, 은선동 (지금의 구원리)이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고, 홍류동 계곡을 따라 가는 길은 해인사 영역에 포함 되어 민가가 형성 될 수 없는 구조이며, 마장동 부근은 가야산 서쪽이라 해야 할 듯 합니다. 고불암 근처의 지역은 고지대로 외적 피할 수 있는 천혜의 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곳은 고지도를 보면 민가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해인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지금처럼 있더라도 마을에 많은 민가가 정착할 수 있는 곳은 아니라고 판단 됩니다. 지금의 마장동에 10여 가구, 치인1리의 상가지구, 해인사 매표소 못 미쳐서 구원리 마을 2곳에 주민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역은 만수동은 될 수가 없습니다. 치인리는 합천군 홈페이지에서도 해발 800m로 논 농사가 불가하여 약초 등을 생산한다고 소개 하고 있는 점만 검토하더라도 쌀 생산이 안 되는 곳이 십승지가 아님을 알수 있다. 1870년대의 합천 지방지도에도 합천은 홍류동, 은선동이라 기록이 있고, 만수동은 없습니다.
이러한 객관적인 사실이 세상으로 알려지지 않아 만수동의 존재는 오리무중인 상태가 된 가운데, 합천군이 십승지의 하나로 선정한 것은 전국적으로 유명 사찰 해인사가 있고, 고운 최치원의 사연 등 이미 인지도에서 성주군 보다는 높았기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한국학 중앙연구원에 이의를 제기하여 ‘합천 가야산 만수동 동북쪽’에서 ‘성주(합천) 가야산 남쪽’으로 수정 됐습니다. 이 부분도 오류를 발견하여 ‘성주 가야산 만수동’ 으로 정정을 요청 하니, “성주 가야산 남쪽 만수동”으로 최종 수정한 통보 내용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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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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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아래의 내용으로 수정 하였습니다.
한국인의 전통적 이상향의 하나이다. 『정감록(鄭鑑錄)』에 근거한 역사적 용어이며, 십승지라고도 한다. 십승지지에 관한 기록은 『정감록』 중에 감결(鑑訣), 징비록(懲毖錄), 유산록(遊山錄), 운기귀책(運奇龜策), 삼한산림비기(三韓山林秘記), 남사고비결(南師古秘訣), 도선비결(道詵秘訣), 토정가장결(土亭家藏訣) 등에 나타난다. 대체적으로 공통된 장소는 영월의 정동(正東)쪽 상류, 풍기의 금계촌(金鷄村), 성주 가야산 남쪽 만수동, 부안 호암(壺巖) 아래, 보은 속리산 아래의 증항(甑項) 근처, 남원 운봉 지리산 아래의 동점촌(銅店村), 안동의 화곡(華谷, 현 봉화읍), 단양의 영춘, 무주의 무풍 북동쪽 등이다.
이제는 새로운 성주 가천을 준비해야 합니다.
사단법인 성주 십승지 연구소는 가야산 만수동을 발굴 개발하고 지속적 관리를 통해 관광 성주의 위상을 높여 나가고자 합니다. 공무원 조직은 지자체간의 갈등 해결에 부담을 가져 신속, 적극적인 업무 수행에 적합하지 않는 부분이 있어, 지역주민이 중심이 되는 민간 자치활동을 선제적으로 전개후 군청의 지원을 유도하는 방안으로 진행해야 할 듯 합니다.
옛날 조선시대 역관 최세진이 쓴 한자학습서 ‘훈몽자회’의 집에서 蒙으로 취급받던 가장 서열이 낮은 어린 손자들이 지금은 제일 높은 지위에 올라가고, 제일 위에 있었던 할아버지, 아버지는 이미 가족내 애완견보다도 순위가 밀려 꼴지에 있는 현실을 보면서 세상은 많이도 바뀌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가천면의 “하ㅇㅇ 서기”라는 분은 수로시설이 제대로 없었던 1970년대 가뭄을 극복하기 위해 직접 지게에 양수기를 지고 1km나 되는 농로를 가서 모내기를 하게 했던 모습이 떠 오릅니다. 6.25 전쟁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못 살던 나라에서 등수를 다툴 때, 필리핀은 장충체육관도 만들어 주었고, 국력을 상징하는 스포츠(축구)도 박성화 감독 등이 선수였을 시기에 말레이시아와 일진일퇴 하는 수준이였음을 추론 할 때, 지금은 세계 경제 10위권의 단군 이래 최대의 잘사는 나라가 되어 백성들은 옛날 임금만이 드셨을 온갖 진귀한 음식을 다 먹어 보고 있습니다. 아직도 1970년대의 ‘소고기에 쌀밥’을 배불리 먹여 주겠다던 국시가 아직도 존재하는 북녘땅도 있습니다.
조선시대 도학정치를 부르짖었던 조광조 선생도 기득권 세력의 정치조작사건인 ‘기묘사화’로 완성되지 못합니다. 마치 근자의 태블릿pc로 거짓말을 만들어 탄핵 분위기를 만들어 성사 시키듯이, 나뭇잎에 ‘走肖爲王 ’이라 쓰고 꿀을 발라 놓아 벌레들이 파먹자, 이것을 근거로 “조광조가 왕이 되는 것이 하늘의 뜻이다.”라고 하며 처형 합니다. 조선시대 도학정치를 부르짖었던 조광조 선생도 기득권 세력의 정치조작사건인 ‘기묘사화’로 완성하지 못합니다.
이제 새로운 성주 가천을 열어야 합니다.
지금 까지 성주는 성주사고 화재, 이창록 사건와 함께 질곡의 역사로 접어 들었습니다. 철기시대의 화려한 명성을 가졌던 가천도 퇴보 해 왔습니다. 사람 살기 좋아 오래 산다는 만수동도 무관심의 영역에서 잊혀진 세월로 자리매김 합니다.
오랜 세월을 마수리 뒷산에서 묵묵히 말없이 있다가, 최근에 세상속으로 모습을 나타낸 ‘만수동 표지석을’ 2021년 8월 22일 유투버를 통해 공개 하였고, 9월 14일 성주신문에 “ 천재지변(天災地變)이나 싸움이 일어나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십승지..... 성주 가야산 만수동” 이란 제목으로 기사화 하였습니다. 한국학 중앙연구원에서 가야산 만수동에 성주가 추가 되었지만, 군청은 지자체와의 갈등을 염려하면서 주저주저 합니다.
군청은 지자체간의 문제, 만수동 이란 주제의 소극적 해석 ( 십승지 조속히 시행하자는 제안에 성주 문화유산 담당의 11월 9일 답변 “십승지는 정감록, 남사고비결 등에 기록된 십승지는 전국 곳곳에 산재해 있으며, 10곳의 십승지로 한정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각 승지의 수와 위치 등은 일부 몇 곳을 제외하고는 자료에 따라 다양하여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으며, 귀하께서 말씀하신 가야산 만수동의 위치비정 또한 원 자료와 이를 해석한 자료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있는 실정입니다. 따라서 여러 자료에서 십승지의 한 곳으로 언급되고 있는 ‘가야산 만수동’의 위치 비정 등은 지속적인 연구성과의 축적과 이를 기반한 논의의 장을 통하여 규명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되며, 향후 위치비정 등을 위해 다각도로 검토할 예정임을 알려드립니다. )으로 계속 검토만 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우선 가천을 중심으로 고향을 사랑하는 성주인들이 십승지의 전국 명소화를 위해 분위기 조성이 필요하다 여겨집니다. 우선 1차적으로 가천면 가천교 앞 로타리에 ‘만수동 모형 표지석’ 설치로 가천이 십승지임을 알리고 관광 자원화의 교두보를 마련해야 한다 생각 합니다. 이 부분도 관청은 조심스러워하니 민간 주도 관광자원 홍보에 심혈을 기울여야 겠습니다. 그리고 도로교통표지판, 십승지 협의회 입회 요청, 만수동 주변 등산로 개발, 십승지 둘레길, 예천 금당실과 풍기 정감록 체험관 같은 테마파크 조성, 친환경 농산물의 십승지 브랜드 개발, 스토리가 있는 만수동 문화 자원화 , 지금도 인터넷 환경은 많이 바뀌었지만 인터넷상 성주의 연관 조회 증가로 인한 성주 이미지 제고 등 많은 효과를 거두어 십승지 ‘전국 명소화’를 위한 사단법인 성주 십승지연구소와 가천면 청년회 등 많은 가천출향인, 성주인들이 함께하는 고향 발전 프로젝트를 진행해야겠습니다. 전국 최초로 ‘민간주도 지역개발의 롤 모델 “로 정착시키고, 그 과정은 민간주도 단체와 성주군청, 성주의회 등 유관기관들과 연계 하는 새로운 ’지방발전과제 수행의 본보기‘가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성주를 사랑하는 많은 선후배님들의 관심을 부탁 드립니다.
앞으로 가칭 사단법인 십승지연구소는 성주군민과 함께 노력하여 명실상부한 십승지 마을의 전국 명소화를 추진할 계획입니다. 1차적으로 관광 안내판 설치, 가천 진입로 로타리의 만수동 표지석 모형 설치, 만수동 둘레길, 십승지 마을 테마단지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 예정입니다. 십승지의 마을 만수동이 관광성주의 중요한 문화 자원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다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