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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 재 성 출향인·유튜버 |
ⓒ 성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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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문명기의 오랜 역사적 전통을 가진 성주는 비옥한 토지와 낙동강의 풍부한 수량으로 벼, 목화 등 곡식 생산이 풍부하여 살기 좋은 곳의 명성을 유지하여 오다가, 해양문명 시기가 도래하여 해안 중심으로 공업도시가 들어서면서 성주의 예전 명성은 위축되었습니다. 잃어버렸던 성주의 명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고, 부모님께서 성주를 터전으로 저를 길러 주셨으니 가끔씩 가보던 성주를 자세히 공부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전국의 여러 산을 다니면서 각 고을의 갖가지 사연들을 접하였고, 그 중 성산지 경산지를 보면서 성주의 본 모습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성주는 한반도의 내륙에 위치하였고, 영남의 명산 가야산을 울타리 삼아 평화롭게 살아가던 중 임진왜란이 발생하니 생명을 보존코자 피난가면서 만수동이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됩니다. 동네 어르신의 구전으로 전해오는 이야기는 “사람이 살기 좋아 장수하는 마을을 만수동이라 이름 짓었다” 합니다. 왜란, 호란으로 생명을 위협 받았고, 뒤이어 세도정치속의 탐관오리의 횡포에 노비가 되는 등 온전한 삶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던 시기에 "십승지" 화두가 백성들의 인심을 파고듭니다. 실제로 전쟁을 피해서 입향한 사실이 사부랭이 경주최씨, 아전촌 김영김씨, 마수리 김해김씨의 족보에서 확인 되었고, 진주강씨도 사대부체면에 십승지 때문에 입향한 것은 아니고, 후손들의 삶의 환경을 찾아 입향했다고 기술하기도 합니다. 성주 가야산 기슭은 전쟁을 피하고, 마수폭포로 흐르는 풍부한 수량으로 사람이 전쟁과 천재지변을 피하여 살기에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어, 곶감을 임금님 진상품으로 만든 고장 이었던 곳이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가야산 기슭의 정착지에는 편안한 삶을 찾으려는 백성들이 하나 둘 늘어나고, 상거래가 발달되지 않은 시기에 거창에서 들리미를 거치고, 증산에서 독산을 거쳐 가천장을 다녀야 했던 산 너머 이웃마을 주민에게 잠시 쉬어가는 공간도 제공 하면서 살아가니 십승지 마을의 명성을 알렸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백성들 사이에 회자되는 새로운 세상 십승지를 찾자는 유행속에 가야산 만수동으로 유입된 사람들을 맞아들이며 함께 살아 가는 동안 나라가 없어지고, 나라가 바뀌고 또 전쟁이 일어나고 혼란한 시기를 보내게 됩니다.
선진국의 지원도 받고 부지런한 국민성을 바탕으로 보릿고개를 극복합니다. 나라도 일반 개인도 살림살이가 좋아지니, 조선시대의 전쟁을 피해 갔던 십승지에 관심이 늘어납니다. 문헌에도 여러 다른 내용이 혼재되어 있어, 목소리 크게 내는 곳의 의견을 따라 성주의 만수동이 합천의 만수동으로 바뀌어 많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 박힙니다. 성주 십승지 연구소에서 잘못된 내용을 바로 잡기 위해 정감록, 택리지 등 고서도 보고, 현장 확인을 합니다. 그 중 기억에 남는 것은 성주가 만수동임을 입증하러 만수동 표지석을 본 기억이 있는 분의 옛 기억을 끄집어내느라 수 없이 통화를 한 것입니다. 또 비를 맞아 가며 가야산을 삶의 터전으로 하는 심마니의 도움도 받지만, 쉽사리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칠전팔기 심정으로 다시 가야산 언저리를 탐색한 결과 마침내 만수동 표지석을 마수리(법전리) 뒷산에서 발견 합니다.
그러나 성주가 만수동이 맞나 하는 부류가 많았습니다. 합천 만수동이라는 인식을 불식시키기가 힘들다고 느끼면서 성주 합천을 또 다시 둘러봅니다. 정감록(택리지)에 나오는 가야산 동북부 200리 찾아 갑니다. 백운리, 봉양리, 동원리, 신계리, 용사리, 학산리, 금봉리, 독용산성 등 백운가야산 탐방대에서 들리미 길 9km를 포함 하지 않아도 200리는 무난한 것으로 측정 하였습니다. 반면 합천은 해인사를 제외하면 50여리 정도 되는 것으로 확인합니다.
지금 성주 가야산 만수동이란 주제로 성주신문과 개인 유투버(korea road view)를 통해 이 사실을 홍보하고 알리는 중이며, 민족문화를 관리 집대성하는 ‘한국학 중앙연구원’에 만수동의 진실 규명을 위하여 관련 자료와 증거를 제출하여 ‘성주 가야산 남쪽 만수동’이라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합천군 가야면’과의 십승지에 관한 논쟁을 하고 있지만, 큰 영향은 없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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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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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실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려 ‘가야산 만수동의 통설(通說)과 실증(實證)’ 이란 책을 발간을 위해 노력 중입니다. 성주 가야산 만수동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고서와 가야산 주변을 여행 한 경험과 내용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가야산 만수동 활성화를 위해 협의체도 만들어 더 많은 주민들의 관심과 동참을 유도 할 방안을 찾고 있습니다. 현재 미완의 만수동 여행이지만, 성주의 명물이 될 관광 명소와 테마파크 개발로 가야산 등산로, 마수폭포, 십승지 마을을 연계하여 관광 성주 조성을 미리 머릿속에 떠올려 봅니다. 십승지 중 예천 금당실 마을과 영주 정감록 체험관 등을 모델로 그 어디에 내놓아도 당당히 최고의 힐링 명승지로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물론 국립공원이 속해 있어 환경부의 허가, 예산 등 많은 난제가 있겠지만, 훌륭한 관광자원을 바탕으로 다시 웅비하는 성주가 되도록 다 같이 노력했으면 합니다.
2021년 12월 31일 10시에 가천면사무소 2층 강당에서 가야산 만수동 활동 공식 출범식을 하고자 합니다. 2021년 마지막 날에 출범식을 하는 이유로 그 동안 성주가 아닌 다른 곳에서 길을 잃고 잊혀졌던 질곡의 만수동 역사를 2022년 새 해에 새롭게 맞이하자는 의미에서 택일을 하였습니다. 서애 선생의 징비록 1598년 기준으로 424년, 만수동 표지석 기준으로 200여년 만에 귀환하는 만수동을 새로운 각오로 맞이하자는 의미를 부여하고자 합니다.
이미 가천지역협의체에서 가천 로타리에 만수동 관련 현수막을 부착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성주 (가천, 수륜)의 발전을 바라는 성주인과 만수동에 관심이 있는 분들의 성원 부탁드리며 ‘가야산 만수동의 통설(通說)과 실증(實證)’을 발간하는 소회를 마무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