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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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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반면교사(10·2항명사건)다
수필가 최 필 동
우리 고대사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현세에 와서도 자주 인용되기도 한다. ‘있는 그대로의 역사’가 되기 때문이다. 또 조선 개국의 위화도 회군, 임진왜란 전 일본의 동향을 살피려 보낸 황윤길 통신사와 김성일 부사를 보냈지만 그 보고는, ‘안정’과 ‘침공’의 정반대였다. 결과는 정유재란까지 7년의 혹독한 국란을 겪기도 했다.
반면교사는 근현대사도 크게 다르지 않다. 독립운동 봉오동 전투의 김원봉(金元鳳)을 두고 우리 국군의 모태(母胎)라고 하는 공공연한 주장도 있고, 또 6·25 때 인천상륙작전의 결과를 두고도 극소수 반대가 있기도 했으니, 이야말로 ‘살아있는 역사’의 중후한 표상(表象)일 것이 분명하다.
얼마 전 국회방송(NATV)에서『우리가 잘 몰랐던 국회史』가 방영되었다. 우리 성주군 출신 김창환(金昌煥) 국회의원(7대, 8대)이, 지난 박정희 정부 때 있었던 이른바 10·2 항명사건 전모를 구체적으로 생생한 팩트만을 증언을 하고 있었다.
자유당 정권이 몰락하고 4·19 이후 수립한 제2공화국이 혼돈을 겪을 때 군부 쿠데타가 돌출하여 제3공화국이 시발되었다. 처음 ‘잘 살아보자’와 ‘국가 재건’의 깃발을 들었을 땐 일부 정치인과 국민들의 반대도 있었지만 그러나 대다수 국민들은 기대를 갖고 협조도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처음 일시적 선정(善政)은 있었을 지라도 결과는 처참한 종말이었다. 그게 권력의 맨얼굴이었다. 독일 히틀러가 몸서리치는 본보기다.
역사는 냉엄하다. 국가 지도자(대통령)의 평가는 더더욱 그렇다. 여느 나라, 어느 지도자도 통치의 공과는 있다. 다만 그 공과의 시비곡직에는 사적(私的) 이해득실과 정치적 편향은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지금도 박정희의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폭력으로 권력은 잡았지만 3선을 거치는 동안 대체로 국민들 의식 수준이 달라졌고 중화학공업, 새마을운동 등의 긍정적 평가가 있는 반면 철권통치, 시월유신 등이 악평의 근원이기도 하다. 이른바 공칠과삼(功七過三)이라는 논자가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박정희 대통령, 헌법이 정한 3선으로 하야를 기정사실로 국민들이 생각하고 있을 때, 당시까지만 해도 언필칭 권력 서열 제2인자는 외형상 JP였다. 그를 캡틴으로 삼고 재정위원장 김성곤 등 ‘4인체제’가 정권 승계 책략을 짜고 있었다. 거기엔 5·16의 한 공신인 길재호도 있었다. 이를 감지한 박정희가 가만있지 않았다. 우선 JP 견제를 위해 4인체제에 힘을 실어주고 권력의 하수인(?)들을 전진 배치했다.
그런데 사건들이 터지기 시작했다. 기본 대책도 세우지 않고 청계천 철거민들을 판교, 분당, 성남으로 내몰았고, 북한 침투훈련조 ‘실미도 사건’도 터졌다. 드디어 내무부 장관(오치성) 불신임안이 국회에 상정되어 공화당 의원 26명이 찬성하는, 이른바 10·2 항명사건이 터진 것이다.
박대통령이 대노한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4인체제가 박정희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임기 종료 후 내각책임제와 지방자치제 실시로 권한 분산 등이 나왔기 때문이다. 더 기가 막힌 사건은 박정희가 골프장에서 4인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인사도 없이 골프장을 떠나버린 것이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공포의 중정이 나섰다. 4인체제와 관련자들을 감금하여 인간으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야만적 폭력을 휘둘렀다. 자택에서 체포된 김성곤과 저항하다 머리가 터져 끌려간 길재호 등 항명 주동자에게 몽둥이질하는 공포의 비명소리를 의도적으로 흘리는, 참으로 반인간적 패당(牌黨)들의 행태였다. 국회의원 육인수(육영수 오빠)도 끌려갔으니 인륜도 짓밟았다. 당시 시중에 나돌던 ‘김성곤의 콧수염’은 진상(眞相)이었다.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60대에 생을 마감하는 등의 비극이 곳곳서 일어났다.
드디어 국정감사 중 8대국회 해산 선포식을 시작으로 영구 집권 ‘시월유신’이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부마항쟁을 부르더니 초유의 대통령 시해사건이 터진 것이다. 이를 ‘권력 무상’으로만 표현하기엔 너무 공허한 엄청난 사태였다. 박정희 정권이 왜 이리 파멸해 갔을까. 무한 권력의 말로는 이리도 참담함을 역사는 가르치고 있었다. 앞서 언급됐던 ‘과삼공칠’을 나는 “과사공육”으로 정정해야겠다. 공과를 소구(遡求)해 보니 그렇다는 말이다.
1986년刊『한국사연대表』에서, 단군 때부터 근현대사(1986년)까지의 사건 기록과 역사적 주요행사들을 기록했지만, 끝내 ‘10·2 항명사건’은 없었다. 심지어 1985년에는 ‘최초의 시험관 아기 탄생’도 있었지만 말이다. 이게 바로 엄혹했던 공포의 권력에 교육(역사 사전)이 매몰됐음은 아닐까···?
8대국회 김창환 의원은 임기 1년 3개월 만에 의원직 날아 가버렸다고, 헛헛한 심회(心懷)를 피력하고 있었다. 고향 선배 김창환 의원님! 망구(望九)의 연치인데 아직도 대처하는 사안마다 강기(剛氣)하고 정연함을 보면서, 30대 초반에 ‘민의의 전당’에 입성할 때부터 국민의 시선과 관심을 불렀던 것이 새롭게 떠오릅니다. 초선의 신선함이 있었을 지어니···.
나는 ‘10·2사건’을 신문 헤드라인만 봤을 뿐인데, 의정단상의 현장에 섰던 분의 생생한 증언으로 여타 연관된 기막힌 사건들의 전말(역사)을 모두 알게 된, 역사안(眼)이 열리는 계기가 되었다. 역시 역사는 반면교사였다.
끝으로 늘 건승하시고 더 많이 ‘살아있는 역사’를 증언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