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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독자마당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김소정 기자 입력 2022.03.15 09:04 수정 2022.05.20 09:04

↑↑ 최 필 동
수 필 가
ⓒ 성주신문


금세기 최고의 석학이요 '창의적 르네상스맨(신문기사 표제어에 나온 말)'이라 모두들 격찬을 아끼지 않는 김어령 선생이 돌아가셨다.

국문학자, 문화부 장관 등 직함만 열 개였다. 특히 세계인의 축제인 88올림픽 때 아무도 상상도 못했을 '굴렁쇠 소년'을 연출했으니 '···르네상스맨'이라 했을 것임이 분명했으리라. 내가 그분의 발자취 모두를 열거할 수는 없지만, 다만 한 가지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설립은 알고 있다. 이 하나만으로도 선생이 '문화예술'의 혜안이 어떠했는지를 감히 짐작만 하는 것이다.

이어령 선생하면 내게는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게 있다. 우리말의 중복어를 두고 소장학자인 선생과 노장 국문학자와 논쟁이 있었는데 노장학자는 '외갓집'은 중복어이니 외가(外家)로 표기해야 한다고 했고, 30대 초반의 소장학자 이어령 교수는 외갓집이 맞는다고 정연한 논리를 펴서 표준어가 된 일도 있었다. 따라서 '역전'이 아니라 '역전앞'도 마찬가지였다.

또 그 훨씬 후 고속도로 한자식 표기 '노견(路肩)'을 두고는 우리말 '갓길'이 공용어로 등재된 일도 있다.

이분이 27세일 때 서울신문 논설위원이었으며, 거기 '흙 속에 저 바람 속에'가 연재로 실린 것이다. 이른바 참으로 가장 서경적(敍景的)이고 관조적이며, 광대한 우주 질서 속에서 인간의 존재감을 자연친화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 우주 질서를 함의하는 어젠다였던 것이라 내 짧은 식견을 피력해 보는 것이다. 내 천학비재(淺學菲才)를 나무라소서.

그때 면서기이셨던 큰형님이 퇴근 때마다 가져온 서울신문을 보는 행운도 있었다. 잡지는커녕 라디오도 귀하고 '읽을거리'가 없을 시절 신문을 본다는 게 내겐 얼마나 큰 행운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던가? 내 나이 지학(志學·15세)을 겨우 넘겼을 때 문사(文士)가 되겠다고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 '흙 속에···'를 밑줄 쳐가며 보곤 모아 실로 꿰매어 보관했었다. 요샛말로 '스크랩'인데 그땐 그 말도 없었다.

그런데 그게 외지로의 유랑(?)세월이 반세기도 더 지나고 보니 안타깝게도 행방이 묘연해지고 말았다. 지금도 3등문사인 내겐 큰 도움이 될 텐데···. 아마도 50여 회분이었을 것만 대강 기억하고 있다.

이어령 선생을 일러 '도서관'이라 비유하는 후학 문학평론가가 있었다. 고려대 김화영 교수였다. 세네갈의 시인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는 "명사의 죽음을 일러 '도서관'이 불탄다"라 했다는데, 이어령 선생을 도서관에 비유하고 있었다.

선생의 위대한 생애를 일러 '축적한 귀중한 기억, 지식, 창의력'으로 비유했으며 세네갈이 사람 죽는 것을 '도서관이 불탄다'로 비유했으니 이어령 선생이야말로 '살아 있는 도서관'이라 했다고 추모하고 있었다.

김 교수는 또 '죽음의 경고와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라틴어의 경구(警句)인 '메멘토 모리'를 일컬으며 이어령 선생을 "이제 편히 잠드소서"라는 애절송을 부르고 있었다.

문화체육관광부장(葬)으로 치러지는 영결식에서 이근배 시인이 헌시를 낭독했다.

"이어령 선생님! 선생님의 아호가 밤을 넘어선다는 뜻의 능소(凌宵)라 하였지요. (···)부디 이제 하늘나라에 오르시어 이 땅의 한 시대의 정신문화를 일깨우고 우주를 휘두르는 빛의 붓, 뇌성벽력의 그 생각과 말씀, 천상에서 더 밝게 영원토록 펼치옵소서."

평소 선생의 생전 메시지는 "···애초에 있던 그 자리로 나는 돌아갑니다."였었는데, 그 메시지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외벽을 장식해 행인들의 시선을 붙잡았다고도 한다. 또 선생은 2~3년 전부터 지인에게 '나 병 걸려서 조금 있으면 저승에 간다. 물어볼 것 있으면 미리 다 물어봐라'라고 했다며, 역시 선생이야말로 고종명(考終命)이라고 상찬을 했다.

더욱 애상을 부르는 시문 '서시'도 있다. 선생이 돌아가시기 나흘 전 쓴 시 말이다. 2012년 세상을 떠난 맏딸 이민아 목사를 기리는 자신의 시집 '헌팅턴 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의 서문인 '서시'였다.

네가 간 길을 내가 간다. / 그곳은 아마도 너도 나도 모르는 영혼의 길일 것이다. /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지 우리 것이 아니다.

선생님, 이 서시를 쓰고 보니 참척(慘慽)이라는 말을 피해갈 수 없음을 용서하소서!

지난 80년대 어느 날 정부광화문청사 뒷골목 다방을 갔을 때였다. 그날 면전에서 선생을 보았으며, 당시 이분의 기고문을 스크랩할 만큼 관심을 가졌던 나이고 보니 육성도 기억하고 있다.

추측컨데 출판업자와 얘길 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때도 너무 저명한 분이라 내게는 두고두고 기억할 만한 분이었다. 하지만 지금 같았으면 아마도 무명서생이지만 통성명이라도 했을 걸! 한다면 내가 너무 분별없는 사람이 될까?

이어령 선생님! 이제는 그리도 잊지 못 하던 이민아 목사님과도 '헌팅턴 비치'에서 상봉했을 지어니 함께 소천의 법열만 있는 천상에서 영생복락을 한없이 누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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