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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 종 출 펫헤븐AEO 대표 |
ⓒ 성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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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신으로 살아온 그는 올해 희수다. 일평생 가족을 위해 헌신하며 산 그는 자신에게 온 기회조차 포기했다. 나이가 들수록 삶에 대한 불안 때문에 한숨이 늘어간다
'그래도'는 그가 한때 호황을 누리며 영업을 했던 가게의 상호다. '그래도'는 배려다. 아무리 속상한 일이 있어도 '그래도'로 마음을 풀면 이내 곧 안정된다. 삶은 늘 우리를 시험하기도 하고 좌절의 쓴맛을 안겨주기도 한다. 설령 아픔이 있다고 하더라도 너무 아파할 일도 포기할 일도 아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물과 현상들을 귀하게 여기면 종내는 좋은 결과로 돌아온다. 세상의 바른 이치다. 우리가 잘 아는 서산대사가 입적하기 전에 남긴 말씀이다. 천 가지 만 가지 생각 모두가 숯불 위에 내리는 한 점 눈송이라네. (千計萬思量 紅爐一點雪).
그는 걸걸한 성격이다. 하지만 허투루 지나침이 없이 꼼꼼하다. 귀밑머리가 희끗희끗 해지면서 이것저것 후회가 생겼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새로운 다짐을 한다. 자신을 희생하면서 가족을 돌봐왔지만 더 잘 해주지 못한 것, 따지고, 포기하고, 덜 배우고 덜 익힌 일, 큰소리 낸 것, 못 보듬어 준 것, 화낸 일, 온통 부족해 보이는 것들이다. '걸'하고 후회한다. 그때는 그것이 최선이고 최상인줄 알았지만 뒤돌아보니 남는 건 미련이고 회한이다. 그중에서도 매우 아쉬운 건 가족에게 너무 크게 상처가 될 못된 말을 했던 걸 기억한다. 한마디의 말을 잘못하면 천 마디의 말을 더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사람은 말(言語)이라고 하지만 짐승은 소리(聲)라고 한다. 한마디 말이라도 두 번 세 번 생각하고 삼가야 한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해놓고 평생을 두고 후회할 수도 있는 게 말이다. 사람의 입에서 말이 나와야지 소리가 나오면 헛말이 된다. 앞날을 살아가는 중에도 '걸' 하는 것을 덜 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그는 어떤 인연이건 먼저 자르는 법이 없다. 삶에서 좋은 인연을 만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건 누구라도 아는 것이지만 인연이란 만만하지가 않다. 좋은 인연이란 시간이 갈수록 은근한 향기와 기품이 느껴져서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친구를 사귀는 인연은 물처럼 담담하게 변하지 않으며 오래가야 한다고 했다. 굳이 구분을 두어 따지지 않더라도 마음이 얕고 이해타산이 빠른 인연은 술처럼 달달하지만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을 하게 되는 부류다. 서애 류성룡 선생은 사귐에 있어 소인배들은 마치 모래와 같아서 처음에는 잘 섞이고 부류를 가리는 일 없다. 하지만 잘 어울리다가도 끝내는 이해관계를 따져 득실을 재다 보면 얼음이 녹듯이 서로 갈라서게 된다. 마음이 깊고 넓은 사람은 옥이 서로 만나는 것처럼 서로를 밝혀주고 자신도 그 빛을 유지한다는 비옥(比玉)이요 마음이 좁고 얕은 사람들의 만남을 취사(聚沙)라 했다. 환경이 바뀌고 세월이 지나도 깊이와 넓이가 한결 같은 인연을 유지할 일이다.
젊은 며느리에게 포장이 꼼꼼하게 잘 된 소포가 배달되었다. 가위로 포장된 끈을 자르려고 할 때 어머니가 말렸다. "얘야. 끈은 자르는 것이 아니라 푸는 것이란다." 며느리는 끙끙대며 매듭을 풀었다. 매듭을 푼 며느리에게 "잘라버렸으면 다시는 잇기가 어려울 텐데 쓸 만한 끈이니 다시 써먹을 수 있겠구나"라고 웃으면서 덧붙여 말했다. "인연도 잘라내기 보다는 푸는 것이란다" 얽히고설킨 인연도, 어렵고 복잡한 인연도 하나하나 풀어 가면 응어리가 되지 않는다.
'척'은 겸손이다. 그는 스스로 겸손하다고 자부할 만큼 낮추고 살았다. 알아도 모르는 척, 있어도 없는 척, 잘나지 않았지만 못난 척도 했다. 가게를 하다 보면 층층 만 층의 사람을 상대하게 된다. 알아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 겸손의 처음이라 생각했다. 늘 바보가 되었다. 아는 척하지 않으면 상대는 자기보다 못한 놈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마음씨 착한 바보로 여겨 도움을 주려고도 한다. 바보가 되면 약삭빠르게 처신하는 사람. 미련한 사람, 마음씨 나쁜 사람처럼 진짜 바보는 모두 다 떠나고 진정으로 착한 바보만 인연으로 남는다. 많이는 아니지만 고만고만한 형편이라도 있는 척하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은 하나 있으면 보태서 둘은 있다고 한다. 체면을 중시해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업신여김을 받지 않으려고 없다는 것보다 있다고 하면서 산다. 어릴 적에 소(牛)가 없는 집이 있는 집보다 훨씬 많았다. 모두가 농사를 지었지만 농사일을 도와주는 소가 없는 집이 더 많았다. 어릴 때 그의 집에는 암소가 한 마리 있었다. 힘이 센 황소가 있는 큰집이 부럽기도 했지만 그 암소는 해마다 그가 공부하는 데 밑천을 낳아 주곤 했다. 암소가 한 마리만 있을 때도 그는 두 마리가 있다고 했다. 암소이기 때문에 송아지를 품고 있어서 두 마리라고 억지 자랑을 한 것이다. 소가 없는 집보다 소가 있는 집이 적었는데도 왜 굳이 두 마리가 있었다고 했는지 그 생각을 하면 지금은 참 부끄럽다. '척'을 한 게 부끄럽다.
그는 늘 없는 자 편에 있다. 줄 수 있으면 주고 토를 달지 않는다. 할 수만 있다면 아낌없이 한다. 나누면 넉넉해진다는 생각은 살림이 넉넉하지 않을 때에도 항상 품었던 그다. 남의 눈에 드러나지 않으려고 어떤 기부를 할 때도 사진을 찍는 일은 절대 없다. 도와주는 척은 더더욱 하지 않는다. 그냥 있는 만큼 마음 가는대로 조금씩 나누지만 잘난 척은 남의 일이다.
외환 위기가 왔을 때 큰 규모로 개업한 친구가 손님이 없어 고전한다는 말을 듣고는 자기 가게의 예약 손님에게 이런 저런 핑계를 대어 친구의 가게로 보낸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부탁을 들어 줄만한 단골들이었지만 자기가 소개해 주었다는 말을 하지 않도록 당부를 해두었기 때문에 친구는 그 사실을 몰랐다. 그는 친구가 미안해하고 부담스러워 할 것을 미리미리 짐작했다. 그런 배려가 진정한 배려가 아닌가 싶다.
그가 암(癌) 진단을 받았다. 착한 바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모든 인연이 내편이 아닌 듯 했다. 어떤 겸손도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았다. 암(癌)이 아닌 척하기에는 귓불의 솜털이 바르르 떨릴 만큼 힘겨웠다. 그래도 다시 용기를 낸다. 시(詩) 낭송을 배우고 음악회에 가기도 하고 가끔은 오래된 인연을 챙기기도 한다. '그래도' 하면서 '걸'하는 후회는 하지 않기로 했다. 모르는 척도, 없는 척도, 못난 척도 하지 않는다. 다만 오늘을 정성스레 맞이하기로 했다. 어제는 없어진 날이고 내일은 장담할 수 없지만 오늘은 내게 와 있으니까 정성으로 맞이하는 것이다.
세상이 녹록하지 않고 내편이 아니다 싶을 때는 욕심을 버리고 마음 속에 따로 작은 가슴주머니 하나 만든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여름날에도 견딜 수 있는 커다란 나무그늘 하나를 집어넣는다. 눈보라 몰아치는 겨울에도 차가운 마음 녹여줄 아늑한 동굴 하나 챙긴다. 체 하는 가면도 벗어버리고, 걸 하는 후회도 끌어안고, 그래도 하는 용서와 배려의 마음으로 따로 만든 가슴 주머니에 집어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