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사상사
지은이 : 이호철 외 30인
목 차
강석경 타고르 <기탄잘리>
고은주 최승자 <올 여름의 인생 공부>
구효서 유치환 <생명의 서(書)>
김병총 서정주 <국화 옆에서>
김연수 알렉산드르 블로끄 <대지 위의 모든 것은>
김채원 D.H 로렌스 <겨울 이야기>
김 훈 김명인 <김정호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문순태 김현승 <플라타너스>
박기동 신대철 <사람이 그리운 날 1>
복거일 김신윤 <경인중구(庚寅重九)>
서영은 김동리 <패랭이꽃>
서정인 이덕무 <벽제점(碧蹄店)>
서하진 이산하 <사랑>
손장순 폴 발레리 <해변의 묘지>
송하춘 이광웅 <연못>
신경숙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유재용 윤동주 <또 다른 고향>
윤후명 박목월 <윤사월>
이승우 최승자 <일찌기 나는>
이호철 김소월 <산>
정길연 정현종 <고통의 축제(祝祭) - 편지>
정연희 전봉건 <물>
정 찬 곽재구 <사평역(沙平驛)에서>
조경란 이진명 <복자수도원>
조성기 토마스 머톤 <그리운 아우야>
차현숙 임길택 <푸념>
최 윤 김지하 <푸른 옷>
최 학 유치환 <춘신(春信)>
하창수 고진하 <묵언(黙言)의 날>
한승원 김소월 <산유화>
홍성원 베르톨트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가나다 순)
줄 거 리
[소설가들은 어떤 시를 ‘애송시’로 간직하고 있을까?]
4권에서 많은 시인들이 ‘백석’과 ‘서정주’의 작품을 애송시로 간직하고 있어 눈에 띄었던 것과 달리, 이번 5권의 소설가들은 동서양과 고전․현대를 망라한 다양한 시를 애송시로 꼽았다.
특히 복거일, 서정인 같은 소설가들은 ‘김신윤의 <경인중구(庚寅重九)>’, ‘이덕무의 <벽제점(碧蹄店)>’과 같은 한시를 소개하여, 요즘 사회에서 거의 읽히지 않는 한시를 음미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다
[본문 중에서]
스무 살, 몇몇 시 쓰는 친구들과 어울려 《난팔지변(亂筆之辯)》이라는 시동인지를 묶었을 때 내 이름 밑에는 이상의 시를 닮은 온갖 기호들로 가득했었다.
유치환의 <생명의 서(書)>를 본 것이 그 즈음이었다. 문학과 부모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하는 기로에 서게 됐을 때 너는 어떤 것을 택하겠느냐고 다그치는, 별명이 칸트였던 친구의 소개로 읽은 책에서였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입고 다녀 걸레처럼 되어 버린 검은 오버코트를 벗었다. 녹음기를 다시 집 안에 들이고, 슬리퍼 대신 검정색 단화를 신었다. 그리고 여전히 내 속에 엄존하는 거지 같은 자아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나를 응시하는 또 하나의 나를 만들어 낸 셈이었다. <생명의 서(書)>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 본문 39쪽 구효서의 글 중에서-
김현승 선생님이 세상을 뜨기 전 마지막으로 광주에 오셨을 때였다. 진헌성내과로 선생님을 찾아뵙는 자리에서 왜 시를 쓰지 않느냐고 꾸짖었다. 나는 소설을 쓰고 싶다고 했다.
“시를 쓰듯 소설을 쓰게. 그러면 됐지.”
그때는 선생님의 그 말뜻을 알지 못했다. 한참 지나서야 선생님의 그 말을 통해서 문학에 있어서 서정성의 중요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쓸 때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려고 애쓴다. 특히 자연을 묘사할 때 시인의 감성을 최대한으로 살려 보려고 노력한다.
- 본문 79쪽 문순태의 글 중에서-
그해 여름, 나는 비를 막느라 비닐포장을 두른 슬레이트 지붕 아래 런닝 차림으로 누워 생각날 때마다 시를 썼다. 대문(이랄 것도 없지만)을 열어 놓았기 때문에 마을버스가 지나가면 자욱하게 인 먼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꼭 길바닥에 누워 있는 느낌이었다. 어쨌건 나는 시를 썼다. 시를 쓰다가 할 일이 없으면 다른 사람들의 시를 읽었다. 그 시절에 잘 읽었던 알렉산드르 블로끄의 시집 이름은 《오, 나는 미친 듯 살고 싶다》였다. 달동네 뜨거운 지붕 아래에 누워 오, 나도 미친 듯 살고 싶었다.
-본문 55쪽 김연수의 글 중에서-
교정을 끝내고 일어설 때 그 출판사의 사장이자, 주간이자, 편집자인 선배가 지금 인쇄소에서 막 가져왔다며 시집 한 권을 내 손에 들려 줬다. 임길택이라는, 처음 들어 보는 시인의 《똥 누고 가는 새》라는 시집이었다. 책을 가방에 넣으며 ‘하긴 똥을 담고 하늘을 날면 오래 날지 못하겠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때 나는 이 시집을, 아니 이 시집에 담긴 시와 사랑에 빠질 줄은 몰랐다. 그 연애가 나를 위로하고, 마음의 소란을 가라앉혀 주고, 미움이 덧없음을 알게 해줄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중략)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웃고 있다. 나도 언젠가 이 시인이 사는 세계로 갈 거다. 그때 꼭 만나 물어볼 말이 있다. “왜 나는 당신 시를 읽으면 웃음이 먼저 나오고, 웃다 보면 슬퍼지고, 슬퍼지다 보면 마음이 착해지냐고. 혹 착해진 마음으로 미처 다 알아보지 못한 당신 마음이 있냐고. 있다면 노자(路資) 대신 이 시집을 갖고 이 먼 길을 왔으니 나한테만 꼭 말해 달라.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 테니.”
- 본문 224쪽 차현숙의 글 중에서-
어느 날 서교동에서 나는 이산하의 시집을 받았다. 그는 조금 상기된 표정이었다. 갈치회와 갈칫국과 갈치조림을 먹고 돌아오는 길, 예의상 펼쳐 본 그의 시집에서 나는 충격을 받았다. 망치가 못을 친다, 못도 똑같은 힘으로 망치를 친다, 나는 벽을 치며 통곡한다……. 어쩌면 이리도 아픈 ‘사랑’이랴, 싶었다. 어느 날부터 갑자기 악몽이 사라졌다……. 난 이미 죽었는지도 모른다, 하는 <악몽>을 읽고는 가슴이 저렸다. 시는 짧고 날카롭고 정확했다. 악몽이 사라지는 것이 오히려 두려운 일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시집에는 잘 읽히는 시와 잘 안 읽히는 시가 절반씩 있다. 머리가 아픈 날 나는 잘 읽히는, 그래서 내 가슴을 아프게 하는 시를 읽는다. 정신이 맑은 날에도 역시 잘 읽히는 시를 읽는다. 모처럼 맑은 머리를 아프게 할 것이 겁나서. 이산하의 시가 담고 있는 세계를 생각하면 아직까지 나는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언젠가 그가 한 말을 생각한다. “니 소설은 말이지. 깡통으로 치면 한쪽에만 구멍이 뚫린 기야. 깡통 위에 양쪽으로 탁, 탁 구멍을 내줘야 술술 풀리는 거라…….” 그의 <사랑>을 다시 읽으며 문득 벽을 치며 통곡하고 싶어진다.
- 본문 115쪽 서하진의 글 중에서-
사랑하는 내 딸 강에게
여름 휴가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산으로 바다로 외국 휴양지로 구름같이 몰려들 간다. 여름은 젊은이들을 들뜨게 하고, 그 들뜸은 자기를 잃어버리게 하고 뜻하지 않은 탈을 일으켜 주기도 한다. 여름은 생명을,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을 증발하게 하고 불태워 재로 만든다.
이렇게 주위가 덩달아 들썽거리는 때에는 소월의 <산유화>를 읽어야 한다. 소월은 인간의 절대고독을 잘 노래한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일 것이다.
- 본문 252쪽 한승원의 글 중에서
작품해설 및 보도자료
[다섯 번째《나를 매혹시킨 한 편의 시》를 펴내면서]
1999년, 《문학사상》에 ‘나의 애송시’라는 제목으로 연재해 온 각계 명사들의 글을 모아 《나를 매혹시킨 한 편의 시》1․2권의 단행본을 출간한 이후, 수많은 전화와 격려 편지, e메일을 통해 계속해서 명사들의 시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독자들의 애정 어린 관심이 쏟아졌으며, 이것만으로도 독자들의 가슴에 시 정신이 아직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힘입어 문학사상사에서는 이 책을 시리즈로 발간하기로 하고 다시 독자들이 좋아하는 명사 30인을 더 선정하여 3권을 내놓았으며, 4권은 ‘시인 편’으로 엮어 시 세계에 사는 시인들의 애송시와 그에 얽힌 이야기를 엮었다.
이번 2002년도를 맞이하여 새롭게 엮은 5권 ‘소설가 편’에서는 항상 소설과 더불어 살아 온 우리 시대 소설가 31인이 자신들만의 멋진 문체로 시에 얽힌 사연들을 풀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