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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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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18일 대만에서는 국민투표가 있었다. 중요한 국가적 정책결정사항을 국민들이 직접 결정하도록 한 것이다. 투표에 부쳐진 사항들을 보면, 제4원전 상업발전 개시, 락토파민이 함유된 미국산 돼지고기 수입금지 등 대만사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사안들이다.
이번 국민투표는 대만 야당인 국민당이 주도한 것이었다. 투표율은 41%대였는데, 투표결과는 여론조사와는 달리 야당이 제안한 4개 사항 모두 부결되었다. 반대표가 많이 나온 것이다. 그에 따라 대만 북부에 공사중이고 공정율이 90%에 달한 제4원전의 상업발전은 좌절되었다.
대한민국과 비슷한 시기에 민주화 과정을 밟기 시작한 대만은 정치제도적인 측면에서 한국과 유사한 점도 있고, 차이점도 있다. 한국의 대통령제와 유사한 총통제를 채택하고 있고, 국회의원(입법원) 선거제도는 소선거구제와 비례대표제를 병렬적으로 시행하는 병립형 제도를 택하고 있다.
다만, 대만이 대한민국과 다른 점 중에 하나는 국민투표 제도가 활성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2018년 11월에 치러진 대만 지방선거 때에는 10개 사안에 대한 국민투표가 같이 치러지기도 했다. 당시 국민투표에 붙여진 사항은 석탄화력발전소를 줄이는 방안, 후쿠시마산 농산물 수입에 관한 사항, 동성커플의 권리보호에 관한 사항 등이었다.
대만의 국민투표제도에 따르면 총통선거 유권자수의 0.01%가 모이면 본격적인 서명을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1.5%의 서명을 얻으면 국민투표에 부쳐진다. 국민투표에서는 전체 유권자의 25%가 참가해야 유효하고 찬성표가 반대표보다 많으면 가결되는 구조이다. 그리고 국민투표가 가결되면 총통을 비롯한 국가기관들은 그 결과에 따라야 한다.
이처럼 대만은 직접민주주의가 상당히 활성화되고 있다. 국민들이 서명을 통해 국민투표를 제안할 수 있게 한 것이 그 원인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1987년 이후 단 한차례도 국민투표를 한 적이 없다. 과거 한미FTA 등의 사안이 있을 때, 국민투표를 하자는 제안이 있었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대한민국 헌법 제72조에서는 “대통령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외교ㆍ국방ㆍ통일 기타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을 국민투표에 붙일 수 있다”라고 되어 있지만, 이 조항은 한번도 행사된 적이 없다. 헌법개정을 할 경우에도 국민투표를 해야 하지만, 헌법개정안이 국민투표까지 간 적도 없다.
그래서 대한민국에서는 투표를 통해 주권자들이 직접 중요한 문제를 결정한다는 것이 매우 낯설다. 그러나 대만 뿐만 아니라 많은 민주주의 국가들이 ‘중요한 문제는 국민이 직접 결정’할 수 있도록 국민투표를 하고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주권자들은 아예 국민투표에 참여할 기회조차 없으니, 선거권 이외의 또 다른 중요 참정권인 국민투표권은 박탈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지방자치에서 도입된 주민투표 제도도 문제가 많은 상황이다. 중앙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추진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는 주민투표가 실시되는 경우가 간혹 있다. 대표적으로 제주도에서 기초지방자치단체를 없애고 광역 단일지방자치단체로 전환할 때 주민투표를 거쳤다. 그러나 이렇게 중앙정부나 지방자치단체장이 하고 싶은 일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주민투표가 활용되는 것은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일이다.
주민투표는 주민들이 원하는 사안에 대해 이뤄져야 하는 것이 기본이다. 예를 들어 일본의 경우에는 핵발전소 유치 여부에 대해서 지방자치단체 차원의 주민투표가 여러 번 이뤄졌다. 법적인 구속력은 없지만, 지역주민들의 의사를 확인하는 의미의 주민투표였다.
아이러니한 것은, 주민투표법이 없는 일본에서도 핵발전소에 대한 주민투표가 이뤄지는데, 주민투표법도 제정된 한국에서는 핵발전에 대한 주민투표를 법에 따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주민투표법에서 국가정책에 관한 사항은 중앙정부만 주민투표에 붙일 수 있도록 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 영덕, 삼척 등에서는 주민투표법과 무관하게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관리하는 주민투표를 하기도 했다.
이런 대한민국의 현실에서는 대만의 국민투표 사례가 좋은 참고가 된다. 물론 국민투표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그러나 선거로 뽑은 선출직 공직자들에게만 맡겨 놓아서는 제대로 된 의사결정이 안 된다는 것이 지난 수십년 간의 경험이다. 이제는 주권자인 국민(주민)들이 직접 결정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 가능성을 여는 것도 대통령, 국회의원같은 선출직 공직자의 역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