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석 종 출 펫헤븐AEO대표 |
ⓒ 성주신문 |
|
아버지의 사진에서 내 모습이 보인다. 세월이 더해 갈수록 점점 더 겉모습이 닮아간다.
말투며 걸음걸이도 점점 더 닮아 간다. 아마도 몸 안의 DNA가 피는 못 속인다는 것을 증명
하는 듯하다. 태어나고 되돌아감에 순리가 그런 것 같다.
큰딸아이 시집보내던 날 문 걸어 잠그고 혼자 울며 흥얼거렸던 노래가 ‘어느 노부부의 이야기’이다. “곱고 희던 그 손으로 넥타이를 매어 주던 때 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때를 기억하오. 큰딸아이 결혼식 날 흘리던 눈물방울이 이제는 모두 말라 여보 그때를 기억 하오” 결혼하고 오 년 만에 외손자가 태어났다. 새 생명이 들어서질 않아서 속을 태우던 딸아이는 결국 현대의학의 힘을 빌었다. 힘들게 얻은 생명을 열 달을 품어 후사를 잇는 일을 해냈다. 흔히들 닮았다고 할 때 붕어빵이라고 한다. 손자니까 아무래도 모계 혈통이 우성일 테고 모계는 곧 친정의 아버지 어머니이다. 손가락이 오물거릴 때는 닮은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첫돌이 되어도 어디가 닮았는지 닮은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부모님은 평생을 농부로 살았다. 엎드려 땅을 대하듯 사람들 앞에서는 늘 습관적으로 허리를 구부리며 자신을 낮추었다. 몸을 낮추고 살아온 농부는 하늘을 무서워했다. 하늘의 그물이 아무리 성글다 해도 마음이 나쁜 사람은 그물을 빠져갈 수가 없다고 믿었다. 하늘을 무서워하는 건 자연을 두렵게 여긴다는 뜻이다. 농부에게 봄은 희망이다. 겨울을 밀어내고 자리를 튼 봄은 땅속 깊이 꼭꼭 숨어 있는 작은 씨앗도 찾아서 방실방실 꽃을 피우게 하고 파릇파릇 잎 새를 피워낸다. 씨앗이나 모종도 봄날의 시기를 놓쳐버리면 당연히 수확을 기대할 수가 없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러하듯 시기가 중요하다. 땅은 용케도 씨앗을 품을 시기를 알고 있다 너무 빨라도 너무 늦어도 결실에는 큰 차이가 있다. 어떤 때는 끝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만큼 시기가 중요하다. 하늘을 두렵게 여기고 자연의 순리를 따르라는 것이다.
어느 해 봄 고구마 모종을 많다 싶을 정도로 내다 심었다. 때마침 비도 와 주어서 활착이 잘 된다 싶었다. 고구마는 보통 한 달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밑줄기에서는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고 끝에서는 새잎이 나오기 시작한다. 온 산과 들에 새싹들이 지천에 널려 있어도 고라니는 농부의 밭에 내려와서 농작물을 해롭게 한다. 누구의 말을 빌리자면 산과 들에 비해서 잘 가꾸어진 농부의 논과 밭은 마치 맛 나는 식재료를 준비해둔 마트(mart)처럼 입맛대로 뜯어먹을 거리가 즐비하다는 것이다. 고라니가 지나간 자리는 새싹들이 잘려 나갔다.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으니 곧 회복할 거라는 희망을 갖게 해주었다. 그런데 아뿔싸 새싹에 입맛을 들인 고라니는 이차 습격을 감행했다. 두 번씩이나 싹을 공격당한 고구마는 성장에 치명타를 입었다. 가을에 땅속은 확연하게 달랐다. 고라니의 공격을 당한 고구마는 어른 손가락 굵기의 상태였다. 실패한 것이다. 사람도 이와 같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아기 유아기 일때의 성장 환경이 그 아이의 장래를 결정짓는 아주 중요한 시기가 될 것이다. 상처받지 아니하고 자란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의 미래는 마치 고라니에게 공격당한 고구마와 비교가 될것같다. 평지풍파를 이겨낸 할아버지를 닮지 말기를 속으로 기도 한다.
봄의 내일은 여름이다. 여름은 성장의 계절이다. 푸르름이고 풍성함이다. 봄에 이어 일 년 중에 가장 꽃이 많이 피는 계절이다. 수백 종의 꽃들이 앞다투어 천지 산하를 향기롭게 한다. 그 꽃들이 열매를 맺으려면 벌과 나비도 만나야 하고 꽃바람도 맞아야 한다. 봄바람은 부드럽다. 볼을 스치는 감각이 부드러워서 마치 어린 아기의 손가락이 꼼질거리듯 간질간질하다. 꽃바람은 다소 심술 굳기도 하지만 꽃나무 에게는 응원군의 역할을 한다. 수정을 해주니까. 꽃바람이 지나고 나면 한여름의 태풍바람은 무서우리만큼 큰 홍수도 몰고 온다. 여름은 봄의 내일이지만 삶에 내일은 계절이 없다. 삶은 언제 어떤 계절과 맞닥트릴지 모르는 것이다. 또 내일은 언제나 예기하지 않은 것들을 데려오기도 한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의연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여름날의 수목들처럼 여유롭고 의연함을 손자 원(圓)이가 닮았으면 좋겠다.
세월이 흘러 가을의 문턱에 와닿으면 여름날의 풍요로움도 서서히 수그러든다. 모든 가을이 결실로 풍성하지는 않다. 태풍이 모든 것을 망쳐버릴 수도 있다. 만산홍엽이 산하를 물들일 때도 땅에서는 이미 서서히 찬 기운이 올라오기 시작하고 하늘에서는 얼음 바람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가을은 갈무리의 계절인데 거두어들일 곡식이 없으면 봄여름을 잘못 보낸 것이다. 사는 일이 힘겹다고 느껴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가을의 결실을 달콤하게 맞을 수가 없다. 살다 보면 어떤 장점보다 단점을 찾아내는 눈이 밝은 사람은 자기 내면에 해소되지 않은 결핍이 쌓여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그들의 입에서는 모든 말이 가시가 되고 모든 행동이 황폐한 것들이다. 삶의 습성이 결과를 초라하게 만들어 버린다. 풍요한 가을이 아니라 황량한 늦가을인 것이다. 결코 조금이라도 닮지 말아야 할 가을의 소회(所懷)다.
계절의 겨울처럼 인생에도 겨울이 온다. 뜨거운 정념도 사그라 들고 욕심도 허물어져 삭막하기까지 하다. 이루어 놓은 것이 없다고 하지만 한평생이 어찌 이룬다고 하지 않을 만큼 작은
이력이겠는가. 삶이 대물림되어 나의 마당을 물려줄 때가 온다. 봄, 여름, 가을을 보낸 짧은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코가 닮았는지 눈이 닮았는지 모르지만 겉모습이 매우 닮아가는 것은 틀림없다. 내 손자도 어딘가는 모르지만 나를 닮겠지. 원(圓 )이라는 이름처럼 둥글게 살았으면 좋겠다. 봄을 맞이하는 농부의 마음처럼 겸손했으면 좋겠다.
유명한 외과 전문의 이국종 교수의 어머니가 이 교수에게 당부했다는 말이 생각난다. “별 볼 일 없는 네가 다른 사람의 인생에 작은 영향을 끼칠 수 있음에 감사해라. 세상은 자신의 자리에서 불평하지 않고 묵묵하게 노력하는 사람을 간절히 기다린단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어려움은 닥치고 그 어려움을 헤쳐 나가다 보면 새로운 길이 보이게 마련이다. 언제나 완벽한 결과를 얻지 못하더라도 과정에서는 훌륭한 동반자를 만나는 것이 우리의 삶이니까.
내가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처럼 이제 막 싹으로 자라난 손자가 어떤 일을 하던 부지런하고 끝없이 도전하고 묵묵하게 노력하는 모습을 닮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