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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독자마당

10월이 오면 만나고 싶은 사람, 친구야 보고 싶구나

김소정 기자 입력 2021.10.26 09:37 수정 2022.05.20 09:37

↑↑ 장 해 익
출향인·경영학박사
ⓒ 성주신문


내가 성주농업고등학교 재학 때의 일이다 학교 실습지에서 마지막 벼 이삭을 베어내고 타작을 끝내자 추수감사절 행사가 이어졌다.

교장선생님을 제주로 삼고 교직원과 재학생들이 제주를 중심으로 빙 둘러 섰다. 추수감사절 행사가 시작된 것이다. 제사상에는 삶은 큰 돼지 한 마리, 떡시루와 각종 과일이 차려지고 제상 양쪽에 촛불을 켜고 "유세차"하고 축문을 읽으며 추수감사절 행사가 대충 끝날 무렵 친구 광조가 트럼팻을 들고 학생들 앞으로 나왔다, 가난한 시골에서 더구나 중학 때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사시는 어머니가 식구들 돌보느라 고생하는 것을 보면 학교를 더 이상 지속 할 수 없다고 생각해 고민하고 있던 때였다. 가슴속에 스며드는 괴로움과 고통을 토로하고파 트럼팻을 불기 시작한 것이다. 저녁노을이 끼어도 가슴 속에 맺인 한을 못 풀고 광조는 트럼팻 독주를 끝내면서 그만 눈물을 쏟아냈다. 장내는 쥐죽은 듯 조용했고 그의 연주는 전교생의 심금을 울렸다. 잠시 후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나왔다

광조로서는 학교수업을 무난히 마칠 수 있는 방법은 고등학교자격 검정고시를 치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그의 처절한 도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광조는 얼마 전에 이름을 석준으로 개명하고 이어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에 합격했고 대학재학시절 고등고시 행정 3부에 합격했다.

그러나 그의 학부성적은 평균 C학점을 넘지 못했다. 그는 그것을 늘 부끄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물가국장으로 승진하면서 우리 공직자 두세 명이 매월 한두 번씩 불고기 파티를 가졌다. 그는 국장 승진과 함께 성균관대학 대학원 행정학과에 들어가고 나는 고려대학 대학원 경영학과에 들어가서 현실 문제를 심층 깊게 토로하기도 했다. 그후 그는 성균관대학 대학원을 올A로 졸업을 하고 부부가 함께 미국 유학길에 올라 못처럼 기분 좋은 한 때를 보내게 되었다.

1983년도에 나는 두 번에 걸쳐 마닐라로 출장 갈 기회가 있었다. 첫 번째는 한국에서 개최예정인 제11차 INTOSAI(국제 최고 감사기구) 총회를 준비하기 위해서 였고 두 번째는 필립핀 감사원 주체 효율성감사에 관한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한 것이었다. 석준도 10월 8일 대통령을 모시고 미얀마 랑궁으로 출국을 할 계획이었다. 석준은 관운이 좋아 차관이 되더니 얼마 안 되어 장관으로 승진하고 9월 28일인가 우리가 같이 서소문에 있는 희원이란 한정식 식당에서 석별의 만찬을 할 때는 이미 부총리가 되어있었다. 다 같이 몸조심하고 잘 다녀오자 하고 이별의 술잔을 나누면서 귀국 후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으나 그게 영 이별이 될 줄이야 그 누구도 몰랐다. 나는 10월 초 먼저 마닐라 행 비행기를 탔다.

그 당시 마닐라는 민주화 데모가 일고 있었고 그 해 8월 하순경 CAL(중국)기를 타고 귀국하던 젊은 야당지도자 아키노가 마닐라 공항에서 암살되어 민심이 무척 흉흉할 때였다. 마닐라 공항에 마중나온 필리핀 감사원 직원마저도 만약 아키노가 CAL기가 아닌 KAL(한국)기를 타고 귀국했다면 암살되지 않았을 텐데 하고 아쉬워 할 정도였으며 마닐라 마카티 시에서는 매일 오후 시간을 정하여 민주화 데모가 일어나고 있어 마닐라 민심은 마로코스 대통령의 권위주의로부터 서서히 이완되고 있었던 것 같았다.

효율성 감사 세미나는 계획대로 진행되게 되어 있었고 세미나 사회는 자율적으로 하되 그날 그날의 사회는 알파벳순으로 하자는 동의가 들어와 본의 아니게 한국(Corea)대표인 제가 첫날 세미나 사회를 맡게 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영어실력도 그렇고 해서 사회자로서 저를 소개하면서 나의 모국어는 한국말이고 두 번째 말은 제가 태어나 자란 일본말, 세 번째는 고등학교부터 대학원까지 배웠던 독일말, 네 번째가 영어이니 세미나 사회를 어느 나라 말로 해야 할지를 물었다. 참석자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박장대소하며 영어로 해달란다. 나는 영어는 서툴지만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하여 갈채박수를 받긴 하였으나 그날은 분명 내 생애에 가장 긴 하루가 아닐가 하는 걱정이 앞섰다. 제일 먼저 한 것은 인도에서 온 씨크 라는 친구를 간사로 지명하고 세미나 내용과 질의응답을 요약케 하여 건의서를 작성케 했다. 오후 4시경 질의응답시간에 자국의 명예 때문인지 네팔, 세일론과 말레시아 인도네시아 친구들이 연이어 의견을 토로하는 데 그들의 말을 통 이해할 수 없었다. 사회자로서 사회권을 발동하여 사회자의 지명을 받지 못하면 발언 못하게 장내를 장악하니 세미나실이 갑자기 조용히 질서가 잡혔다.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교육원 기숙사로 돌아오니 피로감이 엄습해 침대에 누우니 벽에 여기저기 기어 다니는 도룡용이 이국의 정취를 느끼게 했다.

그런데 10월 9일인가 이른 새벽 간사 씨크가 내 방문을 노크하면서 한국 어디선가 폭발사건이 일어났다는 보도소식을 전해주었다. 즉시 주 필리핀 한국대사관에 수소문하여 사실을 확인한 결과 아웅산에서 폭파사건이 일어나 대통령은 이곳 마닐라로 향해 비행하고 있다고 했다. 구체적인 인명사고 내용은 대사관측에서도 잘 모른다는 것이다.

나는 우선 내 친구 서 부총리의 생사를 알려고 노력하였고 얼마 되지 않아 친구 서석준 부총리를 위시한 수많은 대표들이 사망했다는 비보를 서울 아내로부터 전해 듣고 얼마나 허탈했는지 모른다. 9월 28일 이별의 술잔을 나누면서 마닐라는 정국이 불안하니 나에게 몸조심하라고 특별히 당부하던 그 친구가 오히려 먼저 비명에 가다니……

매년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찾아 추모했으나 최근에는 나의 신양과 코로나19 때문에 찾아보지 못헤 미안할 뿐이다.

이제 다시 10월이 오니 더 만나고 싶은 사람, 친구야! 보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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