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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독자마당

조선 십승지 가야산 만수동은 현재 진행형 입니다

김소정 기자 입력 2021.10.26 09:37 수정 2022.05.20 09:37

↑↑ 김 재 성
출향인·유튜버
ⓒ 성주신문


조선십승지 성주 가야산 만수동 형성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십승지의 첫 번째 조건은 외적으로부터 '保身', '避亂'입니다. 외적의 침입이 쉽게 허락되지 않는 지형 조건이 완비되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며, 그렇지 않더라도 적들이 쉽게 근거지를 찾을 수 없다면 십승지라고 해도 무방할 듯 합니다.

성주군 가천은 이미 임진왜란 피난 중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규명된 독용산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수리 뒷산에 만수동임을 증명하는 표지석을 얼마 전 발견하고 성주신문에 기고를 하였습니다.

성주는 임진왜란시 중군의 진격로 부산포- 양산 -밀양 -김해 -창원 -창령 -현풍 -무계 -성주 -김산 -추풍령 -영동 -옥천 -청주 -진천 -죽산 -용인 -낙생 -양재 -한양으로 가는 길목으로 왜병의 침입을 피해 갈 수가 없었으며, 성주성이 함락되고, 성주 사고가 불이 나는 등 많은 피해가 발생했고, 도세순의 용사일기에도 전쟁의 참혹한 참상을 기록하고 있으며, 왜병이 코 와 귀를 베는 등 잔인한 행동도 서슴치 않아 일반 백성들은 '耳鼻'라고 하면서 두려움을 표출하였으며 지금도 '에비'로 변형되어 무서움을 나타내는 단어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임진왜란이 발생하니 가야산을 향하여 첫 번째 이주한 가문이 경주최씨 만호공파 二十一 孫 智山公이고, 字는 遠之 號는 隱溲입니다. 경주최씨 족보에는 임진왜란을 피해 이주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십승지가 연관되어 있다 하겠습니다. 사부랭이 마을 입구에 은수공 기념석이 있는데, 최근에 도로 확장으로 위치를 새로 생긴 사부랭이 마을 입구에 옮겨져 있습니다.

두 번째는 김영김씨 15세손 명중(命仲) 공입니다. 자는 時彦으로 1603년 10월 10일에 돌아가신 것으로 김영김씨 족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김영김씨 명중 공은 피란으로 와서 농토를 개간하는 등 십승지를 찾아가는 조건에 거의 완벽하게 부합된다 하겠습니다.

세번째 김해김씨 58세손인 정남(貞南)공으로 字 道餘 號 星齊 입니다. 공은 光海 丁巳 生으로 마수리에 입향은 성년이 된 기준으로 본다면, 인조 전후 즉 정묘호란 전후 일수도 있겠다 추정 됩니다.

네번째 진주강씨 20세손 문환(文煥) 공으로 字는 光重 號호는 誨山 자(중광) 입니다. 공은 司僕寺正으로 英廟 乙丑년에 입향하여 사신 듯 합니다. 墓는 馬首村 北力洞 子坐이며, 진주강씨 족보에는 마수 입향을 사대부로서 피난지 찾기 위한 십승지와 직접 연관성은 부인 하고 있으며 '자손들이 좋은 환경에서 살게 하기 위해 입향했다'고 하고 있지만 이것 또한 십승지 조건에 하나임으로 볼 때 가야산 부근의 십승지 형성 과정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이외에도 아전촌 영산신씨 덕좌공파도 김영김씨와 비슷한 시기에 입향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족보 등 문헌적 기록은 보지 못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제일 먼저 십승지 가야산 아래 사부랭이 지역으로 이주한 가문은 경주최씨 만호공파 21세손 지산공 이후, 경주최씨 후손들은 사부랭이에서 독산 올미 금바우 등 신계용사에서 집성촌을 이루어 살았으며, 예전 동네의 규모는 각 마을마다 7~80여호에서 현재는 20여호 가구 수준으로 축소되었습니다. 윗사부랭이, 염주실 등 동네는 현재 주민이 살고 있지 않습니다.

김영김씨, 김해김씨 문중도 시차를 두고 입향한 것으로 추정되며, 후손들이 현재도 살고 있습니다. 진주강씨 만호공파 문환 공은 집성촌 문중중 가장 늦은 영조 1761년에 입향하여,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으며, 마수리 또한 거주하는 주민은 많이 감소한 상태입니다.

진주강씨 시정공파 마수동 입향 내력은 고구려 시대 임유관 대첩(서기 698년)의 명장이고, 살수대첩시 을지문덕 장군의 상관이던 원수공(謂l以式)의 먼 후손 박사공(謂啓庸)의 19세손 謂村齊께서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 가칠리에서 살다가 단신 고령군 운수면 화암리 꽃질로 조모이신 광주김씨와 대부인(어머님) 달성서씨를 모시고 이거했는데 그 자제분인 20세손 시정공께서 증조모 광주김씨와 조모 달성서씨, 그리고 선고의 산소를 꽃질에 두시고 대부인(어머님) 밀양박씨를 모시고 마수동으로 입향하셨습니다. 시정공께서 배위 강양이씨 소생 2형제와 배위 경주최씨 소생 6형제를 두셨는데, 그 8형제의 자손이 마수, 새목에 집단 거주하셨다가 시대 변천에 따라 대구, 부산, 서울 등지로 흩어져 자손이 번성하고 있음. 정감록에서 말하는 한강 남쪽에 국가적 위난을 극복할 수 있는 10군데의 명승지 즉 피난처 十勝之地 중 한곳인 가야산 남쪽 萬壽洞을 찾아 남하하였다는 말도 있지만, 사대부 집안에서 집안 경제사정이 극히 곤궁하여 태어나는 후손들의 복록을 위하여 낯설은 타향으로 내려와 후손들이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생활터전을 마련하기 위하여 남쪽 땅으로 이거하신 것으로 추측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이러한 객관적인 사실이 세상으로 알려지지 않아 만수동의 존재는 오리무중인 상태가 된 가운데, 합천군이 십승지의 하나로 선정한 것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사찰 해인사가 있고, 고운 최치원의 사연이 이미 인지도에서 성주군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가야산과 해인사를 연계해서 알고 있기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또 서애 선생의 징비록에 합천 가야산이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은 서애 선생이 정통 유학자로서 잡학 연구는 하지 않으셨으리라 생각되고 , 정인홍과의 교류를 통해 합천이라 잘못된 정보를 받아 기록했다 여겨집니다. 합천은 징비록과 해인사 등 유명도를 활용하여 가야산 남쪽을 과잉 해석했다 하겠으며, 실제로 1870년대의 지도에 가야산 남쪽이 전부 합천으로 그려져 있어 오해했다고 추정할 수 있겠습니다.

성주가 가야산의 십승지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성주 가천 마수리(법전동) 뒤산에 만수동이란 글씨가 쓰여진 표지석이 있습니다. 동네 주민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십승지 관련하여 만수동 표지석의 모습을 성주신문 9월 15일자에 처음 선보입니다. 만수동이 아닌 곳에 만수동이란 표지석을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2)정감록에서 星州 伽倻山南有寄洞라 합니다. 정감록은 성주라고 기록되어 있고, 가야산 남쪽은 성주군이 합천군보다 2배나 큽니다. 3)택리지에서 山東北有萬壽洞이라 합니다. 정감록은 여러 필사본의 내용이 상이한 상태보다는 택리지가 신뢰도에서 우위라 판단합니다. 이 경우 합천군은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아마도 저는 가천의 마수리 곰시 봉양리 사가정 계곡과 수륜 백운동 가야산성의 거리 실제로 측정했습니다. 성주지역의 사라진 마을 윗사부랭이, 염주실, 서침실, 옹기점 등은 현장을 가보지는 않았지만, 200리가 측정됨을 확인했습니다. 4)성산지(가천면 마수동편)에서 사봉 김천석 선생께서 '도덕동'이라 기술합니다. 도덕동이란 도가 잘 지켜져 살기 좋은 동네란 말이다라 해석해야 한다고 판단 합니다. 이것은 지금도 지리산 청학동을 '도인촌'라 부르는 것에 비유된다 하겠습니다. 5)외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어야 합니다. 칠불봉과 동성봉 만물상을 잇는 지역의 가야산성과 금봉리 뒷 산에 독용산성이 있습니다. 전쟁이 발생하면 주위 생산된 곡식과 가축을 데리고 산성으로 들어가면 됩니다. 외적이 가야산성 침입이 무척 어려울 것입니다. 신계용사는 가천에서 30리가 넘는 오지이고, 해발 400m 전후로 합천의 주요 마을과 비교시 고도가 높고 마을이 산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아 접근이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당시 신계용사로 가는 산길은 외적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었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가야시대 수축된 것이라 판단되는 독용산성이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가야면은 유명한 사찰 해인사의 대로에 위치하고 있어 외적의 침입에 바로 노출되어 있고, 만수동이라 언급하는 숭산마을과 가천리, 구미리 등 합천의 마을은 거창고개에서 내려오면 한 눈에 마을 전경이 다 들어 옵니다.

또 치인리가 만수동이라 할 경우, 은선동(지금의 구원리)이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으나, 홍류동 계곡을 따라 가는 길은 해인사 영역에 포함되어 민가가 형성될 수 없는 구조이며, 마장동 부근은 가야산 동쪽이라 해야 할 듯 합니다. 고불암 근처의 지역은 고지대로 외적을 피할 수 있는 천혜의 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고지도를 보면 민가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해인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지금처럼 있더라도 마을에 많은 민가가 정착할 수 있는 곳은 아니라고 판단됩니다. 지금의 마장동에 10여 가구, 치인1리의 상가지구, 해인사 매표소 못 미처서 구원리 마을 2곳에 주민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역은 만수동은 될 수가 없습니다. 지도에도 합천은 홍류동, 은선동이라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6)성산지에 進上乾枾亦出於此이라 하여, 진상품으로 곶감을 생산한다라고 합니다. 곶감은 상주 진영 등이 유명한데, 마수리에서도 곶감을 진상한다 하면 청정지역의 좋은 기운을 받은 곶감이 임금이 드시라고 지정했다 판단합니다. 7)성주군지(가천면 마수조)에 '마수리는 가야산의 아랫자락으로써 예로부터 병란을 피하고, 생리의 덕이 있는 명지의 일처로 일컬어져 만수동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예부터 난세에 많은 은사들이 이곳을 수양처로 삼아 정착했다'고 했습니다. 또 곰시조에는 '가야산 산봉의 동북쪽의 가파른 산언덕 아래 자리한 마을로써 마수 마을과 더불어 천혜의 피병지이며, 난세의 은거지로 알려져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가야산 만수동이 임진왜란때부터 이주해 온 사실을 확인하였고, 그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으며, 산업화로 가구수가 줄어드는 추세는 피할 수 없었지만, 최근 웰빙 트렌드로 살기좋은 시골 지역으로 이주하고 있는데 가야산 언저리에 새로운 이주민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시대가 바뀌어 목숨 부지가 아닌 살기 좋은 복지터를 찾아 성주 가야산 만수동 인근으로 지역을 찾아 오고 있는 현재진행형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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