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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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31일 성주군 초전면 동산리 산 874번지에서 의사 연암 송훈익 선생의 공적비 제막식이 후손들의 주도로 광복회간부 및 유림인사, 일가 친척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거행됐다.
이날 행사에서는 먼저 제막식 전에 일가친지를 중심으로 연암 송훈익 선생의 묘소에서 공적비 제막을 알리는 고유제가 열렸다.
이어 제막식 행사는 송종호 경북대 명예교수의 사회로 개회선언, 국민의례, 내외빈소개, 제막 및 기념사진 촬영, 비문낭독, 감사 인사말과 내빈축사, 축전 및 축시낭독, 폐회선언이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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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에는 노수문 광복회 대구시지부장, 배현탁 성주향교 전교, 윤홍석 현풍향교 전교, 송정택 사단법인 비움서예포럼 이사장, 이명식 대구대 명예교수, 이난희 성주군 복지과장, 고강희 초전면장, 김상화 현풍향교 前 전교, 배재관 성주유도회 회장을 비롯하여 송만수 야성송씨 충숙공 종손, 송준철 단구공파 주손, 송우익 재구종친회회장, 송건회 사직공파 회장, 송철재 선략공파 회장, 송용섭 감사공종회 회장, 송수익 인의공파 회장 등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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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비문을 謹撰(근찬)하고 비문글씨를 並書(병서)한 남계 송정택 비움서예포럼 이사장은 연암 송훈익 선생의 비문 원본을 낭독하고 그 원본을 후손인 송길선(연암선생의 막내아들)에게 전달했다.
송길선씨는 “제막식 거행은 가문의 큰 영광인 바, 행사에 참석하시고 수고해 주신 모든분들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노수문 광복회 대구광역시지부장은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목숨을 내놓고 싸운 선생의 항일 독립운동정신과 희생정신을 기억하고 기록해야 한다”며 “독립유공자 송훈익 애국지사의 공적비가 후세들에게 독립운동 역사의 교훈의 장이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이명식 대구대 명예교수는 “연암공의 공적을 치하하며 공적비 건립을 위해 노력하신 분들에게 감사 드린다”고 전했다.
이종찬 광복회 회장은 “선생이 속한 야성송씨 문중에서 열한분의 독립유공자가 배출되었는 바 독립유공명문가로서의 긍지를 가지기를 바란다”며 “건립되는 연암선생의 공적비가 선열들의 독립운동정신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는 백세각 항일 의적비와 함께 宋氏門中을 상징하며 미래세대의 귀감이 돼 선열들의 행적을 잊지않고 기억하려는 후손들이 많아지기를 기원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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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연암 송훈익 선생의 本貫(본관)은 冶城(야성)이고, 字는 聖放(성방)으로, 忠肅公(충숙공) 耶溪(야계) 宋希圭(송희규)의 15세손이며 丹丘公(단구공) 宋世弼(송세필)의 8세손으로서, 1885년 경북 성주군 초전면 고산동에서 출생했으며, 일찌기 영남유학의 거두인 공산 송준필 선생의 문하에서 漢學을 수학하였고, 성품은 온화하고 근면했으며, 체력이 건장했다.
1919년 3.1만세운동때 송준필 선생의 발의로 주민들이 백세각에서 회합하여 파리에서 개최되는 만국평화회의에 보낼 유림단 독립청원서에 서명하는 일을 도왔으며, 그해의 4월 2일에 성주장날을 기해 전개된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주도·동참했다.
그후 선생은 대한독립만세를 주창하시며 성주경찰서로 행진하던 중 일경에게 체포되어, 대구복심법원에서 국가보안법위반으로 징역형을 언도받고 11개월 18일간 옥고를 치뤄 이러한 애국충정과 공적으로 송훈익 선생은 1990년에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이날 행사의 참석자들은 한결같이 연암 송훈익 선생의 애국행적과 업적에 대해 후손들의 귀감이며 사표라고 한결같이 입을 모았다.
백종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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