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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김창숙 선생

성주신문 기자 입력 2001.08.13 10:31 수정 2001.08.13 10:31

진보적 유학정신, 민족주의 일치시킨 완인(完人)

1879년7월10일 경북 성주군 대가면 칠봉동 사원리에서 부친 김호림과 모친 안동장씨의 외아들로 출생한 김창숙(1879∼1962) 선생은 호를 심산(心山), 별호를 벽옹이라 했는데 이 별호는 일제의 고문과 옥중투쟁으로 앉은뱅이가 된 자신을 일컫는 말이었다.

27세가 되던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공포되자 서울로 가서 조약에 참가한 을사5적을 목벨 것을 상소했으며 1908년 30세 때에는 애국계몽운동 조직의 하나인 대한협회 성주지부를 결성하고 구습타파와 차별적 계급타파운동에 앞장섰다.

이듬해인 1909년에는 한일합방론을 제창한 매국노를 성토하는 건
의서를 중추원에 제출했고 또 1910년에는 향리의 청천서당에 사립성명학교를 세워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영남 및 충청도 유림 137명의 연명으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진정서를 작성, 휴대하고 중국 상해로 건너거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우편으로 우송했다.
이것이 이른바 제1차 유림단 사건 즉 파리장서 사건이다.
1924년에는 만주와 몽고 접경지대에 새로운 독립기지를 건설할 계획을 추진하였고 그곳에 군정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1925년 국내에서 독립운동자금 모금을 전개해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후 선생은 독립운동을 항일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일본경찰에 잡혀 옥중생활을 하면서 혹독한 고문을 받기도 했으나 옥중에서도 일제에 끝까지 굴복하지 않는 의연한 자세를 보이기도 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선생은 신탁통치 반대투쟁과 남한만의 단독선거 반대투쟁을 주도하면서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맡기도 했다. 또 1946년9월 유림의 지원을 토대로 성균관대학을 설립하고 초대학장을 맡아 교육운동에 투신했으며 1950년대에는 정부의 부정과 부패에 항거하다 모든 공직에서 추방당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와같이 투철한 국가관을 가지고 살다가 1962년 84세를 일기로 파란의 생애를 마친 김창숙 선생은 대의명분론에 입각하여 철
저한 비타협의 선비정신을 고수한 진보적 유학자요 민족주의자라고 평가받고 있으며 선생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은 후세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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