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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 필 동 수 필 가 |
ⓒ 성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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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에서 말하는 입신출세를 하면 사회에 기부를 하고 저명인사는 소사이어티 클럽의 회원이 된다. 또는 출신 모교에 기부금을 내어 후원을 하는가 하면 장학재단을 설립하여 모교 발전에 크게 기여하기도 한다. 내 감히 그런 깜냥도 못 되지만, 그나마도 젊었을 땐 좀 낫게 살게 되면 그 어려웠던 시절 꿈을 안고 수륜고공교(현 수륜중학교)에 입학했던 것이 내 인생의 전환기인 것만은 분명하니 조그만 보탬이라도 되고 싶었던 마음은 있었다. 하지만, 지금 제 앞가림에도 전전긍긍이니 이젠 그나마도 포기한 지 오래이다. 참 구차하지만 핑계는 있다. '가난한 삼등문사···!', 이것밖에 없다.
1900년대 미국 유명한 대학교 졸업식에서 총장 인사말이 생각난다. '공부 잘한 학생은 학문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좀 못한 학생은 기업으로 재물을 모아 모교에 도서관을 지어준다'고 했다 한다.
얼마 전 성주군청을 가는 길에 수륜중학교를 방문한 일이 있다. 나이 들면 호사수구(狐死首丘)라 하듯 반백년도 더 지난 옛날로 돌아가 지금의 신파리보다 '만지'라는 지명이 더 정감이 가는 그 길을 한번 걷고도 싶었다. 그런데 흘러가버린 시간만큼이나 어디가 어딘지 영 종잡을 수 없이 변해 있었다. 누구 말대로 시계 초침만큼이나 빠르게 변화하는 세태라더니 그 당시(6·25전후)를 비교하면 딴 나라였다. 당시 고공교는 신작로 옆 언덕 위에 있었고 교문도 없고 교사(校舍)는 네 칸뿐이었으며 교실 바닥은 그야말로 친환경(?)적인 그냥 흙바닥이었다. 그랬던 고공교였었는데 지금은 운동장은 축구장만큼 넓고 교장실 교무실 서무실이 따로 있었으며,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어 당시의 열악했던 상황들이 자꾸만 오버랩이 되는 것이었다. 안내에 따라 서무실에 들어갔고 실장님과 담소를 나누었다. 오래된 일이지만 중학교로 승격되기 전의 문건이 남아 있는가를 물었더니, 그것은 모두 군청으로 이관됐다 했다. 실제로 그 기록이 궁금해서 간 것인데 조금은 헛헛했다. 학교를 방문한 것 그게 바로 호사수구의 심정이었는데 말이다.
학교를 나오며 학생 수를 물었다. 간혹 성주신문에 수륜중학교 기사가 나올 적마다 학생 수가 제일 궁금했지만 사진과 기사만으로는 짐작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물어 본 내가 민망할 정도였다. 이른바 '삼포시대'라 하여 비혼족이 늘어나고 결혼은 해도 출산은 않는 세태이니 인구 감소는 오히려 당연할지도 모르겠다고 속으로 짐작만 하고 학교를 나왔다. 우리 1학년일 때 한 40여 명이었으니 전교생이 100여 명이 아니었을까 한다. 운동장이라 말할 수도 없는 좁은 공간이지만 조회 땐 꽉 찼었다. 지금에 비하면 말 그대로 금석지감에 다름 아니리라.
가볍게 놀랄 일은 또 있다. 가천중학교가 성주중학교로 통합됐다는 사실이다. 가천중학교! 내 고공교 시절, 그 가천중이 정식 중학교였으니 어쩌면 모두 선망의 대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통학 거리 때문에 해당도 안 되지만, 가천중학교에 가까운 학우들은 입학은 우리 고공교였다가 졸업은 가천중이었으니 더욱 그랬다. 그 당시 이웃 용암면 용암고공교가 중학교로 승격되기도 해서 우리도 곧 승격된다고 들뜨던 때도 있었으며, 모표(일제의 잔재인 교복 입고 모표·배지도 달았다)도 '수륜중'으로 도안을 내보라고 해서 나도 냈던 일이 있다. 하지만 끝내 중학교 인가를 못 보고 말았으니 아쉽기만 하다.
나는 그때 그토록 열망하던 중학교 승격을 보지 못하고 자퇴했었고, 1970년대에 와서 대구 내 직장에서 당시 수륜중학교 송동직(宋東稷) 교장선생님을 만나 내 고공교 시절의 옛 얘기를 했던 일이 있다. 그 이후 그 송 교장선생님 소식을 들은 바가 없음이 좀 헛헛하다.당시 가까웠던 친구는 갓말 정영(鄭永)이다. 내 성주신문 기고문을 보고 전화를 해온 것이다. 헤어진 때가 1954~5년경이었으니 강산이 여섯 번이나 변한 다음의 만남의 그 반가움이란 이루 말로 할 수가 없었다. 만나 자리에 앉자말자, 학교 다닐 때 내가 얘기했던 김삿갓의 '입양복일···'을 친구가 꺼냈으니 폭소와 함께 곧 추억이 되살아났다.
그런데 서너 번 만나서 소주잔 기울이던 어느 날, 그때가 아마도 현충일 전이었던가 보다. 전
에 없이 근엄한 표정으로 강원도 어느 육군 사단사령부로 아내 동반해서 간다고 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아들이 ROTC 중위로 복무하다 도강훈련 중 물에 빠진 소대원 2명을 구하고 순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단사령부에 의로운 뜻을 기리는 표지비석이 있어 매년 사단창설 기념일에 초청되어 참례한다고 했다. 다 듣고 난 나는 상찬을 해야 할지 위로를 해야 할지 할 말을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이후, 그 아들이 정재훈 중위이며 보국훈장 광복장이 추서됐다고 서울의 한 일간지에 실렸고, 그 신문기사를 스크랩하여 지금도 갖고 있다. 이제는 마음 놓고 '장한 아들' 칭송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고공교도 좀 과장하면 오늘의 대학만큼이나 소중했던 그 시절의 한 책상에서 '아이엠아보이' 하던 그때를 떠올려 쓰고 보니, 역시 친구 하면 가장 쉽게 떠오르는 '죽마고우'를 적어본다.
친구! 큰 수술도 했으니 건강하길 빌며 이 글을 접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