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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변호? 법의 탈을 쓴 비윤리의 민낯 - 석종출

성주신문 기자 입력 2025.08.05 09:50 수정 2025.08.05 09:50

↑↑ 석 종 출 2.28 민주운동기념사업회 이사
ⓒ 성주신문

 

법은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정교한 문명적 질서이자 마지막 보루다. 그러나 법이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 해석과 적용에서 때로는 정의가 아니라 이해관계에 복종한다. '악마의 변호'란 표현이 있는 까닭이다. 그들은 불의한 권력과 범죄자의 편에 서서 법의 이름으로 상식을 짓밟고, 도덕을 거래하며, 윤리를 저당 잡는다. 민감한 문제지만 한국의 현대사에서 드러난 '악마의 변호'의 몇몇 실례를 통해,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경계선을 경고한다.

2008년, 조두순 사건의 법정에서 한 변호인은 "피해 아동이 유혹했을 수도 있다"는 주장을 펴 충격을 안겼다. 이는 8세 아동에게 범죄의 책임을 전가하려는 전형적인 2차 가해로, 법적 논리라는 외피를 썼지만, 실상은 피해자에 대한 모욕이었다. 국민 여론은 들끓었고, 이 사건은 이후 성범죄 양형기준 강화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당시 법정에서 이런 논리가 입에 오를 수 있었던 현실은, 변호의 자유와 윤리의 무게 사이에 균형이 강조된다.

 

정인이 사건 역시 그렇다. 양부모는 입양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16개월 된 아기를 상습적으로 학대했고, 결국 아이는 장기 파열로 사망했다. 법정에서 양모의 변호인은 "죽일 의도가 없었다"거나 "우발적 사고였다"는 주장을 폈다. 그러나 법의 언어로 교언영색 하더라도, 국민은 '사람을 때려 죽인 자에게 고의가 없었다'는 주장을 납득하지 않았다. 이는 법이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지 않으면 어떤 괴물이 되는지를 보여준 사건이다.

디지털 성범죄로 악명을 떨친 n번방 사건 역시 법정에서 자발적 동의를 주장했다. 변호인은 "피해자 중 일부는 능동적으로 참여했다"는 논리를 내세웠지만, 이는 협박과 조작에 의해 성적 노예로 전락한 피해자들을 또 한 번 짓밟는 행위였다. 이른바 '디지털 2차 가해'였다. 사법의 장에서까지 피해자를 공격하는 태도는, 단순한 직업윤리의 일탈이 더니라 사회 전체가 공유해야 할 '법의 가치'가 무너진 결과였다.

이러한 현대적 사건사례만 있는 것은 아니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악마의 변호'는 과거의 내란과 쿠데타 속에서도 존재해왔다. 1980년 5월, 신군부의 계엄 확대 조치와 광주 학살은 군사 반란이자 내란 행위였다. 그러나 당대의 법조계 일각은 "질서 회복을 위한 조치였다"는 논리로 이들을 비호했다. 결국 사법부는 전두환과 노태우를 내란죄로 유죄 판결했지만, 그 판결이 내려지기까지는 수많은 '법의 왜곡'이 있었음을 기억한다.

최근에도 비슷한 장면이 연출되고 있다. 2023년과 2024년을 지나며 정치권에서는 전직 대통령의 수사와 기소에 대해 "정치 탄압"이라는 주장이 반복되었다. 헌법과 법률에 따른 사법 절차마저 정당성을 의심받게 만드는 이러한 담론은 사실상 '정의의 탈을 쓴 정치적 방패'를 만들려는 시도다. 누군가는 이를 법률가의 논리라고 옹호하겠지만, 그 논리의 끝이 결국 권력자의 면죄부라면 그것이야말로 '현대판 악마의 변호' 가 아닐까.

법은 사회적 합의의 산물이자 윤리의 경계선을 지키는 울타리다. 그 울타리가 권력자나 흉악범의 방패로 쓰인다면, 그것은 법이 아니라 흉기다. 변호인의 직업적 책무가 존중받아야 함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책무가 비상식적이고 비도덕적이며 비윤리적이어서는 안되고 정의를 배반해서도 안 된다. 정의의 탈을 쓰고 법이 괴물이 되는 순간 우리는 다시 '법 없는 시대'로 회귀하게 된다. 우리는 그 경계에서, 법의 본질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되물어야 한다. 정의로우며 공정하고 윤리적이며 양심적인 변호가 당연한 세상이 되어야 절대다수의 보통사람들이 평안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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